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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드뷰 vol.16]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시흥대로의어제와 오늘
1. 정조대왕의 능행 코스
정조대왕은 조선 후기 영‧정조의 르네상스라 일컬을 만큼 전반적으로 발전시킨 부흥기의 왕 이였습니다. 한편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가슴아픈 한을 품은 사연을 가진 왕 이었습니다. 정조는 지금의 서울 삼육대학교에 있던 사실상 버려진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수원 화성으로 이전하면서 정기적으로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에 능행을 갔습니다. 처음 능행코스는 창경궁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세종대로를 통과 숭례문을 지나 용산을 통과하여 한강에 이르면, 정조대왕과 능행일행이 통과할 수 있도록 여러 배를 놓은 배다리를 통해 지금의 한강대교가 놓인 곳을 통과했습니다. 한강 이남에서 정조대왕은 초기 지금의 상도터널이 있는 만안고개를 넘어 장승백이를 지나 지금의 상도로를 따라 숭실대 입구 교차로에서 숭실대 방향으로 길을 틀어 당시 금불고개라 불린 곳을 지나 사당로를 따라 다시 현 이수교차로에서 동작대로를 타고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통과하여 인덕원, 군포 등을 차례로 통과하여 수원행궁을 지나 융릉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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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능행 코스는 언제부터 남태령이 아닌 현 노량진로를 따라 동작구청 방면으로 길을 틀어 장승배기에서 시흥 방향으로 길을 바꾸어 현 신대방삼거리역을 통과하여 보라매역에서 시흥대로를 만나 구로디지털단지역을 통과하여 시흥대로를 따라 안양, 군포를 거처 수원 화성에 이르는 경로로 바뀌였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당시 기술로는 남태령길이 험해 길을 평탄하게 만들기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야사에 의하면 남태령을 지나 과천에서 인덕원으로 가는 도중 찬우물점을 거치는데 여기에 노론의 영수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한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묘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로선 아버지의 원수의 형이 있는 묘지를 계속 지나가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고, 이를 안 신하들이 코스를 변경했다는 거죠. 야사라곤 하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야사가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
이렇게 정조는 바뀐 능행코스를 통해 지속적으로 시흥대로를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시흥대로는 언덕이 적은 편이라서 길을 넓히기 용이 했으며 이 도로는 순조시기에도 확장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일찍 신작로가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변경되고 한강에 새로운 철도길과 인도교를 내기 위해 선택한 곳이 정조대왕의 능행코스인 노량진이란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고종은 정조대왕을 황제 즉위 후, 황제로 추존하면서 고종황제의 3대조로 올렸기에 아마 정통성의 차원이 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정조대왕은 정기적인 능행을 통해서 한양에서 노론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새로운 정치를 펼칠 기회로 삼았으며 능행 과정에서 수시로 백성과 만나 억울함을 풀고 민심을 경청했습니다. 정조는 효심을 활용하여 자신의 새로운 정치를 시흥대로와 수원 화성에서 새롭게 펼쳤던 것입니다. |
2. 서울 서남부의 모든 근대·산업화의 변천을 지켜본 시흥대로
시흥대로는 별다른 도로명이 지칭되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목포 가도란 표현으로 사실상 국도 1호선을 통칭해서 불렀음을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잠시 시흥대로의 변천을 말하기에 앞서 행정구역의 변천부터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특별시는 1963년 ‘대확장’으로 위치와 지금의 행정구역 상 차이를 보입니다. 우선 당시 신문에서 지금의 시흥대로의 시점이 현재와 달리 영등포 로터리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영등포 로터리란 이름이 붙인 영등포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의 한강대교 이남의 노량진, 대방 일대를 경성으로 새롭게 편입하면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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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계속해서 확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1963년 서울시 대 확장에서 현재 강서, 구로, 금천, 관악, 동작이 새롭게 영등포로 편입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등포구청도 지금의 위치와는 차이가 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역에서 한강 인도교를 지나 노량진을 거처 영등포 로터리까지 전차가 다녔을 만큼 교통의 요지인 영등포 로터리에 원래 영등포구청이 위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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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시흥대로 변천을 말하다가 뜬금없이 영등포구청의 위치를 먼저 말하는 것은 시흥대로의 시작 위치 역시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일정하게 영등포구청을 기준으로 시흥군 경계까지를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흥대로는 현재 시작 위치적인 대림삼거리 보다 훨씬 위쪽인 현 신길로의 시작 위치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했습니다. 이는 과거 한강 이남으로의 다리는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가 한국전쟁까지는 유일한 인도교였고 이후 추가로 휴전 이후 김포공항과 도심을 잇는 현 양화대교가 건설하지만 1970년대 본격적인 강남개발의 시작인 현 한남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서울 도심을 잇는 주 간선도로는 한강 인도교에서 영등포 로터리, 그리고 시흥대로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이는 한강 이남의 유일한 전차 노선이 한강 인도교–영등포 로터리란 점이며, 이미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을 만큼 오래된 지금의 시흥대로와 영등포로, 노량진로가 서울 서남부 주요 간선도로 망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도로명은 따로 기재가 돼 있지 않았으나 1966년 9월 17일 자 『조선일보』에서 “이름갖는 「간선도로」란 기사 제목에서 당시 제1한강교(현 한강대교)-영등포구청 사이를 ‘육신로’로 영등포구청에서 시흥군 경계까지를 ‘풍년로’로 이름한다는 기사에서 비로소 정식적인 도로명이 나옵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로서 오래전부터 길은 닦여 있었으나 실질적인 도로명은 이때가 돼서야 정식적으로 이름이 붙여집니다. 기사에서는 이 도로명이 미국 등 선진국에서 도로명 주소 체계를 본떠서 ‘지리적 유래, 역사적 상징적인 명칭’으로서 동서를 ‘로’로, 남북을 ‘가’로 도로명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서울시의 현재 도로명의 시초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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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대로의 ‘시흥’이 직접적으로 도로명으로 변경된 시점은 1968년 11월 17일 자 『조선일보』에서 “새이름 다는 서울거리”라는 제호에서 새롭게 부여된 새 가로망 중 하나로 “시흥로”가 나옵니다. 시흥로는 영등포구청에서 출발–시흥 경계까지의 도로를 지칭했습니다. 이때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과천, 안양, 의왕을 통칭하는 광범위한 행정구역인 구 ‘시흥군’을 지칭합니다. 여전히 시작은 영등포 로터리에 있는 당시 영등포구청을 기점으로 지금의 신길로와 현 시흥대로를 합해 ‘시흥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 이남의 행정구역은 한강대교를 경계로 서쪽은 영등포, 동쪽은 성동구가 폭넓게 행정구역을 양분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서울 서남부의 주요 간선 기능을 했던 시흥로는 영등포구를 남북으로 통과하는 도로망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분구는 1973년 관악구, 1977년 강서구, 1980년 동작구, 구로구, 1988년 강서구에서 목동지역이 양천구로, 1995년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나눠지면서 현재와 같은 행정구가 완성되었습니다.
한편 한강 이북의 성동구가 한 때, 한강대교를 경계로 서울 동남부 전체를 커버하게 된 이유는 잠실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잠실은 여의도와 같은 섬이며, 잠실 섬의 북쪽을 신천강, 남쪽은 송파강이라 불렀습니다. 이때 강폭은 지금과 달리 쉽게 이동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당시 한강 이북의 행정구인 성동구가 현 강남 3구 지역을 모두 커버하는 광범위한 행정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때 강남은 지금과 달리 위치가 영등포였으며, 당시 영등포 동쪽인 성동구 한강 이남 지역은 사실상 논밭으로 치수 처리시설이 없어 장마 때면 탄천이 범람하여 거대한 진흙 바로 상식적으로 변하던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에서 ‘영동’이란 별칭으로 불렸으며, 실제로 1970년대 현 한남대교인 제3한강교가 준공하여 본격적인 강남개발이 추진했을 때, 당시 이름도 ‘영동개발’이었습니다. 이는 영등포가 당시 얼마나 광활하고 거대한 면적, 그리고 서울 한강 이남에서 얼마나 발전된 지역이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
한옥이 종이로 포장된 집이라는사실을 아시나요 ?
#배무이 #벽지수집
배무이 강동수대표는 광주광역시에서 한옥 리모델링과 한옥연구를 하는 10년차 청년목수다. 그러면서 한옥기록가이기도 하다. 본인의 레이다에 들어온 한옥은 건물과 가옥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공간을 3D도면으로 남긴다. 강동수대표는 한옥전문가답게 한옥을 낱낱이 알게되면서 우리가 이제껏 주목하지 못했던 ‘벽지’에 꽂혀 작년부터는 그의 아내와 함께 벽지수집작업도 하고 있다. 동양미래대학교 교수님 한 분이 창덕궁 복원하면서 벽지를 최초로 발굴한 이후, 한옥 민가의 벽지를 수집하는 것은 배무이가 최초다.
#배무이 #청년목수 #강동수대표 이주영무용가, 프랑스에서 한국무용기록을 외치다 !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전승하는데 있어서 기록만큼 중요한 행위는 없다. 무용도 마찬가지다. 나라별 무용기록 방법 및 개발의 역사가 다를지라도 한 국가의 뿌리 깊은 정체성과 결부된 전통무용을 전승하고자 하는 노력은 국가와 민간을 막론하고 전개되어 왔고, 현재진행 중이다.
#이주영무용가 #안무가 #무용기록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좋았어요!  ㅣ 음, 잘 모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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